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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그 섬에 내가 있었네

by 뭇새 2008. 5. 14.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글, 사진 김영갑

Human & Books, 2판 2쇄 2007.10.22.

 

 

김영갑

1957년 충남부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주소지를 두고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그곳에 매혹되어 1985년 아예 섬에 정착했다.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등 섬 곳곳 그의 발길이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또 노인과 해녀,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억새 등 그가 사진으로 찍지 않은 것은 제주도에 없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에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친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사진을 찍을 때면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이유없이 허리에 통증이 왔다.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3년을 넘기기 힘들거라고 했다. 일주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고에 쌓여 곰팡이꽃을 피우고 있는 사진들을 위해, 또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손수 몸을 움직여 사진 갤러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2002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투병생활을 한 지 6년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그가 손수 만든 두모악 갤러리에서 고이 잠들었고, 그의 뼈는 두모악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이제 김영갑은 그가 사랑했던 섬 제주, 그 섬에 영원히 있다.

-책 날개에 적힌 그의 소개글-

 

한 사람의 일생은 간결하다. 어제 본 '파이널 컷'이라는 영화를 보면 태어나는 순간 인체 내에 기억을 저장하는 임프란트를 해 자신이 보는 것이 그대로 기록되게 된다. 그리고 죽고나면 그 임프란트를 가지고 편집자들이 추모영상을 만들어 상영을 하게 된다. 남은 자들은 편집자들이 만든 영상물을 보고 죽은 자를 추모하지만 편집자는 그들의 일생 모든 순간, 모든 사람, 모든 행위를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일생은 그럴 경우 아주 유장하다. 그러나 압축하면 누구나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는 유장하지만 삶의 구도는 그렇게 세 도막이다.

이 책의 날개에 적힌 그에 대한 소개보다 더 잘 정리할 자신이 없어 그대로 베겨 보았다. 그래 놓고 보니 사람의 일생은 한 문장이기도 하고, 한 단락이기도 하다. 삶은 간결하다. 그가 그토록 많이 찍어서 창고에 곰팡이가 슬 것을 염려하였던 그 사진들 중에 이 책에 실린 것은 그의 삶에 대한 두 단락의 문장만큼이나 압축적이다.

 

우연히, 루게릭병에 걸린 남자, 거의 동시대의 이쪽저쪽에 살았던, 살고 있는 두 남자의 글을 연이어 읽었다. 질병은 이쪽저쪽에서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그들을 사색하게 하고 서서히 소멸하게 만든다.

 김영갑의 글 속에 유효기간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자신의 삶의 유효기간을 늘리기 위해 그는 사진을 찍었고, 갤러리를 만들었을까?

영생이 없음을 알지만 유효기간을 알지 못하는 우리네들은 자신의 유효기간을 산정해 보지 않은 채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1장 섬에 홀려 사진에 미쳐, 2장 조금은 더 머물러도 좋을 세상

2장의 꼭지와 책 뒷표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 무지개가 나즈막한 오름 옆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진이다. 그의 말대로 삽시간의 황홀이란 그런 것, 그는 삽시간의 황홀같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갔나보다.

 

그의 글에서 밑줄 친 구절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걸린 희망은 선망에 가깝다. 선망은 너무도 쉽게 욕망으로 변질되고 만다. -황대권의 서문에서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다. p37

-욕망과 열정, 질투, 분노... 인간의 극한 감정들이 모두 사라진 기력 없는 노인들의 말법이 되어주는 것이 나의 또 다른 일과가 되었다. p49

-신구간(제주도에서는 이사철을 신구간이라고 한다. 신들이 옥황상제에게 새해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이때 이사나 집수리를 하면 동티가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신구간은 절기상으로 대한 오 일 뒤부터 입춘 전 삼 일까지 약 일 주일이다.)은 놓쳐 한 달 동안 여인숙에 머물러야 했다.  p53

-바느질에 열중하다 보면 혼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야 할 때는 바느질감부터 찾는다. 울적한 날에는 바느질이 최고다.  p65

-역시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일 뿐 객관적인 것일 순 없다. p79

-사물이 놓인 주변환경에 따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확연히 다르다. p80

-사진 속에 표현된 분위기는 사진가의 감정(마음)을 통과한 선택된 분위기다. p9134

-일출과 일몰 사진을 통해 내가 감상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둥근 해가 떠오르고 넘어가는 과정의 풍경뿐만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그 감동까지 함께 나누고 싶다.  p135

-그릇의 쓰임이 빈 공간에 있듯, 사진 속의 공간도 최대한 비워놓는다. p137

-나 자신을 위해 찍는 사진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위한 사진이다.  p137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p145

-운이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운은 사진가 스스로 준비해서 맞이하는 것이다. p145

-마라도에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마라도는 느낌의 섬이다. p154

-바닷가마을에는 늙은 해녀들을 위해 할망 바다가 할당되어 있다. p161

-무언가에 몰입할  수 없는 하루는 슬프다.  p194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p199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p199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이름이다.  p203

-이제 기다림은 나의 삶이다. p211

-누이는 말없이 나를 길들였다. p225

-이제 마음으로 숱한 사진을 찍는다. p234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두려움 없이 기꺼이, 기쁘게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p236

-삽시간의 황홀은 그렇다. 잡념에 빠져 있으면 작업에 몰입하기 힘들다. p243

 

(2008.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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