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우포늪
우포의 일몰을 보고 싶었다. 일몰에 맞추어 우포에 간 적이 없어서 남들이 찍은 사진이 아닌 내 눈으로 그곳을 보고싶었다.
토요일 일몰 시간을 맞추어 우포늪으로 향하였다.
가시거리가 정말 좋다. 날이 많이 풀렸는데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겨울날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예감이 좋다.
12월,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우포에 갔을 땐 날이 흐렸다.
잔뜩 기대를 하고 갔지만 가서 만난 것은
멀리 보이는 물닭들과
홀로 서 있는 중대백로 한 마리
그리고 키 큰 포플러 나무 위 단단한 까치집
몇 송이 남아 흔들리는 갈대와 물억새뿐이었다.
흐린 날에 세상을 보면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또한 남들과 동행한 시간들은
개인의 시간의 흐름을 따르기보다
단체의 흐름을 따라야하기에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오늘은 날이 맑아서
내가 오래도록 고대했던 우포의 일몰을 마음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나서부터 달라진 것이 많다.
세상을 틀 안에 넣어서 바라보기...
사물과 자연의 윤곽을 보기...
빛이 얼마나 피사체에게 중요한 것인가...
피사체가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배경도 절대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보다는
세상을 넓게 깊게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문 밖에서 보는 세상과 문 안에서 보는 세상은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여러 번 갔던 곳이었지만
목적에 따라 그곳이 얼마나 달리 보이는지도 마찬가지다.
서생왜성을 오르느라고 진하 바닷가를 여러 번 갔지만 바닷가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에 대해서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명선도의 오메가 일출 사진을 보고서 그 섬이 처음으로 본 듯이 다가오기까지 하였다.
우포늪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늦은 봄날 지나치던 우포늪엔 자운영이 한창이었다. 들꽃에 관심을 가지던 시절이라 우포늪의 자운영이 기억에 남기는 했지만 늪 전체의 풍경이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포의 일몰을 촬영하기 좋은 곳으로 관광지 우포쪽에서는 우포와 대대리 논을 나누고 있는 대대제방 위쪽이라고 되어 있다.
생태관을 지나서 길을 따라 걷다보면 늪이 나온다. 왼편으로 키 큰 포플러 나무들이 서 있는 쪽으로 가면 전망대가 나오고 오른편으로 길을 잡으면 대대제방이다. 12월 초에는 물이 얼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새 많이 추웠는지라 물이 얼었다. 새들이 그때보다 더 많이 보인다. 멀리 새들이 얼음 위에 줄지어 앉은 모습이 겨울풍경답다.
제방 위로 올라서니 부드러운 산 능선 위에서 지는 해가 붉다. 제대로 된 일몰을 보려고 제방 위를 부지런히 걸어갔다. 겨울답지 않게 맑고 포근한 날씨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지 않고 정신이 들 만큼 적당하다.
걷다가 돌아다 보니 겨울억새와 갈대가 역광으로 빛나고 있다. 지는 해가 언 수면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건너편 전망대쪽으로 난 길섶으로 늪과 물가에 선 왕버들 한 그루와 겨울나무들, 물 위에 줄 지어 선 새들, 늪을 둘러싼 산의 능선들이 겹쳐서 부드러운 선들을 만들고 있다. 무채색이지만 날이 맑아서 오히려 색의 깊이가 더 짙게 느껴진다.
해가 점점 산 등성이 가까이로 떨어지고, 떨어지는 빛은 물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그 풍경을 잡자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빛 차이가 강해서 측광을 하기가 정말 어렵다. 조리개 우선모드로 찍고 보니 너무 어둡고, 수동모드로 하려니 측광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리저리 마구 셔트를 누르다가
어느 순간
그냥 손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붉은 해가 산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겨 놓은 붉은 빛의 여운을 잠시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아무리 잘 찍어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더라도
내 눈이 보는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다 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렌즈에 담지 못한 풍경은 마음에 담자. 마음에 담은 풍경은 언제든 내 마음 속에서 노출도, 화이트밸런스도, 콘트라스트도, 밝기도 조절할 것이고, 이리저리 잘라내기도 할 것이다.
해가 지자 날은 차가워졌다.
새들도 둥지를 찾아가는 해질 무렵
나무도
물도
갈대와
물억새도
새들도
지는 해마저도
몸을 낮춘
겨울 우포늪을
돌아나오는 길에 새파란 하늘에
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하얗게 뜬 초생달을 마음에 찍었다.
낮의 부산함을 덮고,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 낮과 밤이 교차되는 이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매직아워라고 한다. 우포를 떠나오면서 차 안에서 보는 일몰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한 일몰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200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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